[Oversea’s Letter]
광고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가,
‘Look at Me’ 이야기
글 김세은
자폐는 ‘사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제일기획에서 일하던 2년 전 어느 날 TV 광고나 지면 광고 말고도 실질적으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Launching People(a)에 관한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는 과제를 받았다. 광고회사에서 제품을 파는 광고만 하는 게 아니라 아이디어로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니! 게다가 별다른 제한도 없는, 그야말로 아이디어 내는 사람들에게는 할 수 있는 것도 많고 가능성도 풍부한(또 어렵기도 한) 백지수표 같은 과제였다.
첫 번째 브레인스토밍은 과연 삼성전자의 기술이 어떤 분야 어떤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또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였다. 각자 의견을 냈는데 의료, 빈곤, 환경오염 등 생각보다 많은 분야에서 아이디어와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다.
팀의 한 명이 “지인의 아들이 자폐가 있다”며 말을 꺼냈고, 이를 통해 자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는 점도 알게 됐다. 첫 회의 후 숙제가 생겼다. 스마트폰이나 카메라 같은 디지털 기기에 포커스를 맞춰볼 것.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과 도움이 필요한 분야들이 나왔으니, 이제 기술을 ‘어떻게’,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차례였다. 그런데 회의 때 나온 얘기 중 유난히 자폐에 관한 이슈가 내 마음에 들어온 이유는 주변에 자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자폐에 관한 소설과 영화 등이 많이 있었음에도 나 자신이 자폐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왜 윗집 사는 자폐를 가진 아이는 엘리베이터만 타면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는 건지, 왜 “안녕” 하고 인사하면 땅만 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건지, 자폐아와 그 가족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또 영화에서처럼 과연 모든 자폐를 가진 사람들은 천재인 건지 평소에는 별 관심 없었던 것들이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회사일이 끝나고 집에 가는 도중 자폐에 관한 영화나 다큐, 그리고 의학 논문을 반쯤 졸면서 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렵고 낯선 의학 용어들이 조금씩 익숙해져갈 무렵 자폐 증상 중 ‘눈 맞춤(Eye Contact)’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 논문에나 반복적으로 실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자폐아들은 눈 맞춤이 힘들고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인터랙션이나 커뮤니케이션이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렇게 쉬운데 자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 눈을 보는 게 힘들 수 있다니. 처음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와도 눈 맞춤이 쉽지 않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홀로 야근하던 어느 금요일 밤. 깜깜하게 불 꺼진 사무실이 무서워 얼른 예능 프로그램 다시보기를 눌렀다. 눈에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눌렀는데, 거짓말처럼 <무릎팍 도사>에 나온 가수 김태원 씨가 자신의 아들이 자폐를 앓고 있다는 게 아닌가. “아직도 아들과 대화하는 꿈을 꾼다”는 그의 말은 눈 맞춤에 대한 증상이 그저 논문에만 쓰여 있는 건조한 ‘사실’이 아니라 자폐아가 있는 가족이 겪어야 하는 힘겨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어떻게 기술적으로 다가갈 것인가
자폐아들의 눈 맞춤으로 관심 분야를 좁혀나가다 보니 이제는 ‘어떻게’가 가장 큰 숙제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보게 된 유튜브 동영상이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한 특수교육 교사가 눈 맞춤 트레이닝 방법을 설명한 동영상이었다. 눈 맞춤에만 포커스를 주기 위해 A4 용지로 얼굴을 가린 채 조그만 구멍을 뚫어서 자폐아와 눈을 보며 소통을 했다. 뷰파인더로 상대1방을 보며 사진을 찍는 모습과 비슷했다. 얼마 전 갤럭시 카메라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이제 카메라도 스마트폰처럼 앱을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1. ‘Look at Me’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의학 논문 및 동영상을 리서치했다.
2. ‘Look at Me’ 아이디어 스케치.
3. ‘Look at Me’ 캠페인 소개 영상.
유튜브에서 본 전통적인 눈 맞춤 훈련법을 디지털화해서 앱으로 만들면 카메라랑 스마트폰 기기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눈 맞춤 트레이닝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자폐 치료나 1:1 트레이닝은 굉장히 비싼 데 비해 디지털 기기를 이용하면 보다 많은 자폐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컴퓨터 모니터에서는 리서치용으로 틀어놓은 영국의 한 다큐멘터리에서 자폐아를 둔 엄마의 인터뷰 내용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애절하게 “Look at mommy, look at mommy”라고 말했다. Look at mommy…. 그렇게 해서 타이틀을 일단 가제 ‘Look at Me’로 정하고 캠페인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이 아이디어를 회의에서 발표할 때 나도 확신보다는 의문점이 많았다. 일단 의학적으로 가능한 건가, 눈 맞춤을 트래킹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 제품에서 가능할까…. 의학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에 팀원들뿐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려면 아이디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운 좋게도 내가 읽었던 논문들 중 하나가 충북대 김혜리 교수가 쓴 거였다. 앉아서 전화만 돌릴 때가 아니라 뭔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할 때였다. 몇 번의 통화 끝에 직접 충북대에 가서 인터뷰를 했다. 또 주위의 지인들을 괴롭혀 여러 아동발달전문가 의사들의 연락처도 어렵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야, 너 만날 졸더니 요샌 내가 본 중에 제일 열심히 한다” 충북대에 가서 인터뷰를 해오겠다며 KTX 티켓을 프린트하고 있으니 옆 팀에 앉아있던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한다고 생각하니, 야근할 땐 없었던 에너지도 생기는 것 같았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얘기해 보고 또 뭔가 가능성이 보인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게 재밌어졌다. 아마 내가 생각해도 제일기획에서 근무한 4년 5개월 중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기쁘게 일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사실 ‘Look at Me’ 캠페인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던 것보다 뒤의 과정이 훨씬 더 길고 스토리도 많다. 광고회사에서 앱을 왜 만드는지 늘 설명해야 했고, 이게 기술적으로 가능한 건지를 각종 기관들과 늘 체크해야 했다. 또한 의학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검토하고, 실제 의학적인 연구 데이터로 쓸 수 있도록 협력하는 일 등도 고민거리였다.
의사, 교수, 개발자, 부모들 등 여러 사람을 만나 하나의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일은 재밌기도, 또 사실 엄청 힘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능력있는 좋은 팀원들과 함께한 덕분에 1년 좀 넘는 고생스런 앱 개발 기간 등 많은 어려움에도 성공적으로 캠페인을 론칭할 수 있었다. 게다가 ‘Look at Me’는 작년에 칸 국제광고제를 비롯한 많은 상을 받으며 각종 미디어에 소개됨으로써 자폐에 대한 관심과 이해도 늘어나고, 또 앞으로 있을 학문적인 연구에 데이터가 쓰인다니 그동안 같이 고생해준 팀원들, 프로젝트에 참여해준 부모님과 아이들, 그리고 도움을 준 여러 지인들에게도 여러모로 감사하고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가 된 것 같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기술과 아이디어
평소에도 관심이 많던 분야지만, ‘Look at Me’를 진행하며 뜻을 같이하는 캠페인들을 세계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몇 년간 활발히 연구돼 왔고, 앞으로도 굉장히 많은 발전이 있을 분야인 ‘Tech for good movement’. 최첨단 디지털 기술과 좋은 아이디어가 만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쓰이도록 디자이너, 엔지니어, 공학박사, 의사 등(심지어 해커까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하나의 움직임인데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IBM, 삼성전자 등 많은 거대 IT 기업들뿐만 아니라 아이디어로 무장한 광고 에이전시, 그리고 굉장히 많은 스타트업까지 가세하고 있는 분야이다.
특히 유럽과 미국에서 가장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마치 몇 년 전 화두가 됐던 융합(Convergence)과 통섭의 개념에 따뜻한 기술이라는 의미 있는 목적지가 생긴 것 같다. 작년 이노베이션 부문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What3words’ 또한 Tech for good의 좋은 예이다. 전 세계 지도를 3m x 3m의 정사각형으로 나눈 후 내 위치의 GPS를 바탕으로 3개의 무작위 단어를 조합해 주소를 부여하는 이 앱은 특히 주소가 없는 빈민가나 개발도상국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누구나 클릭만 하면 주소를 갖게 되는 이 심플한 앱 덕분에 주소가 없어 보급 물자가 전달되지 못했던 지역에 이제 각종 보급품 공급 및 구호 활동이 쉬워지게 됐다. 콜레라 등 전염병이 도는 곳 주변 우물의 주소를 주민들에게 공유해 전염병 확산도 막을 수 있게 됐다.
‘Be My Eyes’는 시각장애인들이 길을 잃거나 앞에 있는 우유가 상했는지 등 도움이 필요할 때 실시간으로 자원봉사자들과 화상전화를 연결해주는 앱이다. 이미 존재하는 화상통화라는 기술과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가 만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쓰인 대표적인 예이다. Open Bionics와 디즈니의 3D 프린터 의수도 마찬가지이다. Open Bionics는 의수가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디즈니와 협력해 슈퍼맨, 아이언맨, 겨울 왕국 등의 캐릭터를 모티브로 의수를 디자인했고, 의수를 착용한 아이들은 치료보다도 마치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이 최첨단 의수는 3D 프린터로 제작돼 비용과 시간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기에 많은 아이가 보다 쉽게 의수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Tech for good 연구들과 캠페인들은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최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IT 기업들에서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기업들 중 구글은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 2005년에 만들어진 Google.org는 1000억 달러가 넘는 규모의 투자와 기부를 해온 구글의 자선 사업 기구로, 돈만 기부하는 전통적인 CSR 캠페인에서 벗어나 아이디어와 디지털 기술 개발을 통해 글로벌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1. 2015년 칸 국제광고제 이노베이션 부문 그랑프리 ‘What3words’. ⓒwhat3words.com
2.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화상통화 앱 ‘Be My Eyes’. ⓒdesigntoimprovelife.dk
3. 아이들을 위해 Open Bionics와 디즈니가 만든 3D 프린터 의수. ⓒopenbionics.com
기술 발전의 진정한 의미
‘Look at Me’를 끝으로 회사를 떠난 지 1년이 됐다. 한국을 떠나 주위를 둘러보니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기술이 그때보다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스마트 기기들과 당연시 여기는 각종 테크놀로지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나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등 정말 필요한 곳과 만났을 때 진정한 기술 발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개인뿐만 아니라 거대한 자본과 최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는 더 많은 기업까지 한마음으로 사회적인 문제들(Social Problem)을 대한다면 정말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주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하버드대학교 패널들과 구글이 함께 매년 선정해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들을 모아놓은 영국의 유명한 ‘Nominet Trust 100’ 사이트를 보니 2015년을 빛낸 100가지 Tech for good 아이디어가 올라와 있다. 올해 2016년에는 또 어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아이디어 100개가 나올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해가 지날수록 더 많아지고 있어 괜스레 마음이 포근해진다. 그리고 기술의 문명을 누리며 사는 이 도시가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a. ‘Launching People’은 단순히 제품만 론칭하는 기업을 넘어 삼성전자의 기술로 사람들의 꿈과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브랜드 캠페인이다.
김세은은 제일기획에서 약 5년간 아트디렉터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밴쿠버에 있는 에이전시에서 시니어 아트디렉터로 캐나다 국내외 광고를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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